Rev. Dr. Sang-Bok David Kim was born in communist North Korea in 1939 and came down to South Korea as a young boy of eleven years old during the Korean War in 1950 without his parents. Educat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BA), Korea and having earned MDiv and STM degrees from Faith Theological Seminary, and ThD degree from Grace Theological Seminary, USA, taught as Professor of Theology for 36 years at Washington Bible College, USA, and Asia United Theological University, Korea and also served as the founding president of Torch Trinity Graduate School of Theology, Korea. Wasghintbon Bible College and Capital Bible Seminary, Lanham, Maryland, where Dr. Kim taught for 15 years, honored him with a Doctor of Divinity when he resigned to return to Korea, and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Deerfield, Illinois also awarded him with a honourary Doctor of Literature. In addition to his teaching career Dr. Kim pastored several churches for 43 years, having founded the Bethel Presbyterian Church, Ellicott City, Maryland, USA. Dr Kim also served as Executive Director of Torch Mission Center, co-chairman of Korean World Missions Association, chairman of South and North Korean Church Cooperation Commission and North Korean Church Restoration Commission, Christian Council of Korea, chairman of Asia Theological Association, co-chair of AD 2000 and Beyond Movement, Korea. Dr David Kim is presently on the International Council, World Evangelical Alliance, serves as chairman of Transform World Movement and Transform Korea, as a co-general editor of Asia Bible Commentary Series with Dr. Bruce Nichols. Dr Kim currently serves as senior pastor of Hallelujah Community Church, and chancellor of Torch Trinity Graduate School of Theology, Korea, and chairman of 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Asia. Dr. Kim authored 110 books and countless articles, publishes the bi-lingual Our Daily Bread, and speaks weekly on CTS TV, FEBC, C3TV. He is married to Young Ja Lee, three daughters and six grand children.
金 相 福 (號 太恩) 1939년 1월 11일 평양 출생
◈ ’50년 평양10중 입학, 6..25중 남하, ’51~’54 부산중 졸, ’54~’57 경복고 졸, ’57~’63 서울대 종교학과 졸(BA), ’60~’62 육군 학보병 제대, ’62~’65 미8군 헌사 통역조사관, ’65~’68 미국 훼이스신학교 목회학석사(MDiv) 수석 졸업, ’69~’72 동 대학원 신학석사(STM), 인디아나신학대학원 철학박사, ’72~’77 그레이스신학대학원 신학박사(ThD), ’90 워싱톤신학대학 명예신학박사(DD), ’97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대학원 명예문학박사(DLitt), ◈ ’68~’69 미국 뉴저지 트렌톤장로교회 목사, ’69~’75 인디아나 박슬리장로교회 목사, ’73~’74 와르소TV방송국 Other Lands and Other Cultures 프로 제작 방송, ’75~’77 와르소장로교회 목사, ’75~’77 인디아나폴리스 채널 40 기독교TV방송 Colleges and Issues Forum 대담 프로그람 담당, ’72~’77 인디아나신학대 교수, 교무처장, 대학원장, ’77~’90 워싱톤신학대 교수/목회학과 과장, 아메리칸대, 달라스신학대학원, 휘튼대학원, 트리니티복음주의신대원 겸임교수, 영국 에딘바라대 초빙교수, ’78~’90 워싱톤기독교방송국 이사장 및 방송설교자, ’79~’90 북미주청소년지도자연합회장, ’80~’90 미주 지역 한영 이중어 [오늘의 양식] 발행인, ’88~’90 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회장, ’90.6 귀국, ’90~’97 아세아연합신학대 조직신학 주임교수, 횃불선교센타 실행위원장, ’97~2000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총장(현 명예총장․교수), ’91년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자, ’90~ ’97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자문위원, 청소년위원장, 북한교회재건위원장, 남북교회협력위원장, ’91~(현) 평신도목회연구원 원장, ’92~2000, AD 2000 and Beyond Movement 국제이사, ’94~(현)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장, ’95 GCOWE 세계대회 182개국 대표 참석 공동회장, ’97 남아공 GCOWE 세계대회 주강사, 세계신학교총학장(PAD)대회 의장, ’97~2000, International Council of Higher Education 창립이사, ’97~’03 사랑의 장기기증운동 이사장, ’92~(현) 아시아신학연맹(ATA) 이사 및 이사장, 2000~(현)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EFA) 회장, ’02~(현)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A) 국제이사, ’02~’04 월드인쿼리 국제연합(WI International Coalition) 회장, ’03 테헤란, 이슬람-기독교 평화대회 명예회장, ’03~’04 예루살렘 평화대회 공동회장, ’04 이라크복음주의신학교 후원이사장, ’04 태국 파타야 로잔대회 주강사, ’04 장애인돕기 마라톤대회장, ’05 북한 어린이 분유보내기 걷기대회 대회장, ’06 성남 CTS TV 본부장, 극동방송, CBS, CTS TV, C3TV, 21TV 등 설교자, ’90~(현)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 ’59 전국대학생영어웅변대회 1등, ’68 훼이스신학대학원 수석 졸업, ’91 한국을 움직이는 차세대 지도자 50명 선정, ’92 러시아 옐친 대통령 감사 친서, ’92 KBS 모닝 와이드 “금주의 인물,” ’94 한국교회 10대 지도자, ’95 한국교회 7명의 목회자, ’98 한국을 달군 13인 선정, 2000 이 세대의 목회자, ’01 주한 미국대사 감사장, ’01 월간중앙 잡지의 한국교회 30인 인물, ’01 New Century Award 아시아 500인 지도자, ’02 2000 Outstanding Intellectuals of 21st Century, ’02 조선일보 한국교회 25명 최고설교자, ’04 한국교회 100인 목회자, ’06 한국교회 100인 설교자, 기독교TV “목자의 향기,” 미국과 한국 여러 잡지의 표지인물로 소개. 각종 해외 Who’s Who in the World, Who’s Who in America, Who’s Who in Asia 및 국내 저명인사록에 등재 ◈ 저서 : ‘지도자에게서 배우라’, ‘잃어버린 왕좌’, ‘꿈은 이루어진다’, ‘행복의 비결’, ‘목회자의 리더십’ 등 117권의 저서․번역․편집 출판, ◈ 1,133편의 논문 및 글을 국내외 학회지․잡지․신문에 발표.
한국교회10인목회자, 세계신학교총학장(PAD)대회 의장, 워싱턴신학대 교수
GCOWE 세계대회 182개국 대표 참석 공동회장, 할렐루야교회 담임목사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김일성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은 초등학생
김 목사는 일본의 기독교 탄압이 최고조에 도달했던 ’39년 평양시 인흥리에서 기독교 가정의 9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가 이끌던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주일학교 아이들은 주 목사의 신앙을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주 목사의 일사각오 신앙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목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조회시간에 전교생이 일본을 향해 일본 천황에게 절할 때도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목사와 누이는 우뚝 서서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평양 모란봉에 있는 신사 앞길을 지나던 전차가 서서 승객 모두가 신사를 향해 합장하고 절할 때도 절을 하지 않았다. ’48년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 정권이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학교 측은 교회에 가는 아이들이 항복할 때까지 몽둥이나 쇠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기도 하고 급우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강요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 교회에 못 나게 막았다. 그래서 포기하는 아이들이 늘어났으나 목사는 절대 항복하지 않았다. 신앙심이 강하신 모친과 교회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6․25 이산가족, 고교시절 영어클럽 조직
중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돼 6․25가 일어났다. 1․4후퇴 때 부모님과 동생 4명을 평양에 두고 형들과 누이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그 길로 북의 가족과는 이산가족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54년 부산중을 졸업한 목사는 책가방 하나와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무작정 홀로 상경, 10대 1의 타교생 입학경쟁률을 뚫고 무사히 경복고교에 합격했다. 물론 등록비도 거처도 먹을 것도 교복도 교과서도 아무 것도 없었으나 등록금 면제와 장학금 혜택 등 기적으로 길이 열렸다. 중학교 시절 부산역 앞 공회당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군에게 영어를 배우게 되면서 3학년 1년 동안 학교 측의 요구로 고교입시를 위해 매일 수업 1시간 전에 동급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던 목사는 고교 1학년 때 남산 꼭대기에 있던 미군 통신부대 26살의 미군을 만나 JOY라는 학생영어클럽을 조직에 참여하고 서울역 앞 세브란스의대 교실에서 고교 3년간 매주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고3 때에는 학교에서 최초 영자신문을 창간하고, 유엔학생부장으로 활동하고 외국인 학교들과 교류하며 국제적 감각을 키워갔다. 그 결과 고교졸업 때는 영어회화가 거의 해결된 상태였다.
서울대 시절 4․19혁명과 ‘새생활운동’ 범국민적으로 전개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던 목사는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 가장 많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신사훈 박사의 제자가 돼 라틴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영어는 물론 독어․불어 공부와 함께 종교학, 철학, 영문학에 전념했다. 가정교사와 장학금에 의존해서 학교에 다니던 목사가 4․19를 만난 건 4학년 때였다. 그때 경찰이 시청광장에 모인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덕수궁 입구 골목으로 달아난 목사를 향해 경찰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전봇대 뒤로 몸을 숨겨 위기는 면했으나 바로 앞에 서있던 친구의 이마를 관통,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등 3차례나 죽을 뻔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역사의 한고비를 넘기며 교정으로 돌아온 문리대생들은 교정 풀밭에 모여 앉아 활발한 토론 끝에 친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국민의식과 생활개혁이 아래로부터 일어나야 한다는 데 합의를 하고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중심이 돼 ‘새생활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은 팀을 짜서 당시 사회적 문제들 즉 간첩으로 인한 안보문제, 국산품 애용을 통한 국내 산업 및 고용 증진, 양담배와 커피 같은 낭비적 밀수품 사용반대, 기름 절약 차원에서 자전거 타기, 지도급 인사들의 부정부패 제거, 급증하는 퇴폐문화 타파, 한국문화 개발노력 등에 대한 연구결과들을 문리대 대강의실에서 발표하자 대학생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있었다. 이렇게 자발적인 ‘새생활운동’이 시작됐다.
육군 참모 총장, 장면 총리, 국회, 언론, 국민 참여
처음에는 정부, 경찰, 언론, 대학본부 모두가 학생들이 과격하다고 비판하고 ‘새생활운동’의 중단을 강요했으나 점차 순수한 학생들의 뜻을 이해하고 지지 폭이 넓어져갔다. 서울대 모든 단과대학의 가담에 이어 타 대학들도 참가했고, 6개 대도시로 번져가면서 중고생들까지 참여 길거리에는 새로운 생활을 부르짖으며 어른들을 설득하는 조직된 학생들이 나타났다. 육군참모총장은 전군에 군 트럭이나 지프를 민간인이나 개인 용도의 사용을 금지했다. 장면 총리는 이 운동을 자신의 3대 정책 가운데 하나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국회는 학생들의 주장을 입법화하겠다고 부의장을 내세워 작업에 들어갔다. 방송들은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어 단막극으로 홍보했고, 연극인들은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시인들은 시를 썼고, 음악인들을 노래를 작곡해 불렀다. 길거리와 다방과 극장과 카바레와 댄스홀 및 호화 유흥업소를 찾아다니며 새생활을 설득하는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시민들은 길거리에 빵과 음료수를 쌓아놓았고, 기업인들은 점심 값을 손에 쥐어 주는 등 국민이 전적으로 지지를 했다. 잡지들은 특별 인터뷰를 실었고, 비판적이던 신문들도 긍정적인 기사를 실으면서 목사를 이 운동의 대장이라 보도했다. 그러나 조직상 대장은 없었다. 조직 내 권력 싸움을 피하기 위해 언론이 소위 대장이라 부르는 이를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연락원’이라 불렀다. 이 운동을 통해 목사는 한국의 미래와 희망을 보았다.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어느 터키 대위는 귀국 하루 전 문리대 안에 있는 새생활운동 본부를 찾아와 그 동안 일본을 왕래하면서 밀수한 물건을 팔아서 번 당시로서는 적잖은 돈 미화 백 불짜리 10장으로 천불을 내놓기도 했다. 여름방학 동안의 이 운동은 일단 끝이 났고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4학년 한 학기를 남겨놓고 학보병으로 자원한 목사는 군 복무 1년 반 동안 역시 ‘새생활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누구도 감히 감행하지 못한 고질적인 2가지 부정부패에 반기를 들었다. 보충대에서 前任期들이 後任期들의 새 군화를 뺏고 헌 군화를 물려주는 오래된 악습의 폐단을 시정키 위해 전임기들이 몽둥이를 들고 군화를 빼앗으려 할 때 조직적인 격투를 벌리도록 주도, 대대 전체의 문제로 비화시켜 일소시킨 것이 그 하나다. 또 국군의 날 사단장 이하 참모장교들과 각 중대의 대표 105명의 사병들이 사단본부에 모여 국군의 날을 축하는 자리에서 대화의 시간에 누더기인 사병들의 평상시 군복부터 쥐꼬리 같은 사병들의 월급, 부식과 보급품들을 상관들이 빼돌리는 게 다반사인 부대 내의 부정부패 폭로는 말할 것도 없고, 상관들의 부패로 인해 만약 전쟁이 날 경우 부하들이 상관을 먼저 쏠지도 모른다고 도전하여 사단 전체의 부패를 개혁케 한 점이 또 하나였다. 저녁을 먹으면 그냥 잠을 자는 무료한 전방의 군대생활에 저녁을 먹고 나서 중대 앞마당에 모여 장기대회 등 게임하는 시간을 주도, 중대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 점도 ‘새생활운동’의 실천이다.
제대하던 날 ‘미8군 통역조사관’으로 취직, 직장생활을 하며 대학 마지막 학기를 마쳤다. 통역조사관의 업무는 미군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범죄사건에 대해 미군의 사건은 영어로 조서를 만들어 군사재판에 넘기고 한국인은 조사해서 경찰에 넘기는 일이었다. 이 일을 통해 인간의 악행을 3년 반 동안 목격하게 됐다. 범죄를 조사하는 일만을 평생 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미국에 유학을 가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공부를 하고 싶었다.
‘국제친선회’ 민간외교활동
목사는 ’62년 ‘국제친선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대사관 대사와 직원들, 외국 유학생, 한국 거주 외국인들과 우정을 나누었고 국제친선의 밤을 워커힐이나 YWCA 강당 같은 곳에서 개최하며 국제적 문화행사와 외국인들 간의 교제의 폭을 넓혔다. 총리실과 외무부의 협력을 받아 이 단체를 활발하게 이끌었는데, ’65년 워커힐에서 국제친선의 밤을 가졌을 땐 정일권 국무총리가 참석하기까지 했고, 그 행사가 끝났을 때 정 총리가 목사를 총리비서로 초청했으나 그 때는 이미 유학수속을 마친 후여서 받아드릴 수 없었다.
훼이스신학대학원 동양인 최초 수석졸업, 미국교회 목회자로 초청
’65년 8월 말 훼이스신학교에 도착했다. 목사를 미국으로 이끌어주신 분은 그 학교 부이사장 홀드크로프 박사였다. 신학교는 일종의 목회자 양성소였다. 기독교 철학교수가 돼 사회개혁의 일익을 감당하고 싶었던 목사에게 갈등이 시작됐다. 그렇다고 그 많은 수고와 많은 돈을 드려 막 결혼한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데려온 박사님의 체면상 다른 학교로 가지도 못하고 원치 않는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2학년 말 채플시간에 윌리암 하딩이란 구약학 교수의 욥의 고난과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설교 중 절대자 하나님을 깨닫게 됐다. 그 날로 인생 전부를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그 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데 헌신하기로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 날 자신으로부터 해방을 받아 인생에 대한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신학공부가 재미가 있어 마지막 1년은 열심히 공부, 졸업식장에서 부인과 함께 이중창으로 축가를 불렀고 동양인 최초로 수석졸업의 영예도 안았다.
축하박수를 받으면서 학위수료장과 졸업상을 받아 들고 퇴장하는 그 때 뉴저지주 수도 트렌톤에 있는 미국인교회 갈보리장로교회 장로로부터 목회자의 초청을 받았다. 목회할 생각은 없었고 신학공부를 계속해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이미 대학원에 등록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많은 고심과 줄다리기 끝에 대학원 공부와 목회를 같이 하고 또 1년 후에는 공부하러 떠난다는 조건 하에 목회를 수락했다.
인디아나신학대학원 박사 과정, 목회, 신학교 교수, 방송 대담 프로
약속대로 1년 후 인디아나폴리스로 떠났다. 먼저 버틀러대 철학과 고든 클라크 교수 문하에서 원했던 기독교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복음주의계열 기독교 철학자로서는 가장 이론이 정연한 클라크 교수의 저서를 다 읽고 온 터인데 저서와는 달리 그의 강의는 너무 건조했다. 그 학교를 그만 둔 후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순교적인 고난을 오랫동안 격고 출옥하여 미국에 온 뽀뽀브 목사의 철학박사학위 수여식에 관한 신문광고를 보고 그 졸업식에 참관하게 됐는데 그 학교의 복음주의적 신앙과 신학이 마음에 들어 그 학교에서 이 두 개의 석사학위를 이미 소지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여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갔고 교수의 기회가 주어졌다. 철학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정식교수가 됐으며, 5년간 봉직하면서 교수, 교무처장, 대학원장 등의 보직도 거쳤다.
분주한 신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워싱턴신학대학 교수로 전근
오랫동안 기다렸던 교수의 기회를 얻게 되자 본래 계획대로 곧 훼이스신학대학원에서 교수가 추천했던 그레이스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셰리단에 있는 박슬리교회의 초청을 받아 미국교회 목회도 겸하게 되었다. 목회, 교수, 공부, 가족, 기독교TV방송 등으로 동분서주했다. 4년간의 연구 끝에 복음서자료 연구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삶의 본래 목표였던 교수 하나로 집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워싱턴신학대학에서 교수 초청이 왔다. 다른 세 곳에서도 요청이 왔으나 세계의 중심인 워싱턴으로 결정했다. 워싱턴신학대학은 경건훈련이 잘 돼 있고 세계선교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자체 라디오 방송 프로그람도 있었다.
워싱턴 한인사회를 만나다
워싱턴신학대학에 혜성처럼 나타난 37세의 젊은 교수 소문을 듣고 약 4만명의 한인교민들이 살고 있는 워싱턴에 크고 작은 24개의 한인교회 중 한 교회에서 주일 아침예배에 초청했다. 김 교수는 처음 한인교회 초청을 받아드렸다. 14년간 미국교회와 미국신학교에서 사역을 해왔기 때문에 거의 사용하지 않아 녹이 쓴 언어가 되어버린 한국말로 설교하자 단어가 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 교인들에게 물어가며 설교했다. 그러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이 교회는 금토일 특별집회를 해달라고 요청,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주제를 걸고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한 메시지와 한인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사흘 동안 제시했다. 2-3백명 정도 되는 교회였는데 처음 온 사람들을 포함하여 많은 교인들이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 깨닫고 결신하게 됐고 희망을 제시하는 설교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됐다. 이 집회에 참석했던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통해 소문이 워싱턴 전역에 금방 퍼졌다. 다투어 목사를 초청했다. 첫 1년 동안 24개의 교회를 거의 한 바퀴 돌면서 방문, 설교했고 워싱턴에 나타난 젊은 교수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커져갔다.
워싱턴 지역 대 전도대회 강사
여러 교회 평신도들은 워싱턴신학대학에 와서 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싶어 했다. 목사는 학교에 특별히 요청, 그들을 위해 특별 저녁강좌를 개설했다. 수강자들 중 평신도들 40여명이 전도자가 되겠다는 강렬한 도전을 받고 워싱턴 지역 대전도대회를 계획하여 개최했다. 당시 유명한 한국부흥사들이 집회를 해도 많이 모여야 500명 정도였는데 목회자들이 없이 순전히 평신도들이 준비한 집회에 그 3배인 1,500명이 운집, 미주한인교회 사상 최대집회로 기록됐다. 평신도들은 김 목사를 강사로 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포의 희망”이란 주제로 3일간 저녁집회를 고교강당에서 가졌고 토요일 오후에는 청소년들을 위한 영어집회를 가졌다. 삼일 동안 153명의 성인과 수십명의 청소년들이 예수를 믿기로 결신했다. 미국 전역의 5개 한인신문들은 사진과 함께 1면 톱기사로 실었다. 곧 ‘김상복 목사’라는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다. 전국 타 도시로부터 같은 종류의 집회를 요청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미국만이 아니라 캐나다, 유럽, 남미에서까지 끝없이 요청이 들어왔다.
워싱턴 기독교 방송국 설립
성공적인 워싱턴 지역 대전도대회 이후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집으로, 가게로, 자동차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져 KBS 아나운서 출신 김영호 씨 등과 함께 워싱턴기독교방송국을 설립했다. 목사가 이사장으로, 목사의 집회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깨닫고 결신한 분 김영호 씨를 방송국장으로 해서 이사회를 구성됐다. 이 방송을 통해 교포들에게 매주 메시지를 전했고 귀국 시까지 11년 동안 이사장 및 방송설교자로 계속 섬겼다. 목사의 방송테이프 요청이 전국에서 쇄도하기도 했다.
미주 청소년 운동,
’78년 목사가 워싱턴에 온 후 1년 만에 청소년을 위한 집회가 열렸다. 목사의 영어설교는 미국 청소년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치유를 받고 희망을 보았고 강력한 믿음이 생기기 시작한 청소년들의 반응은 열정적이었다. 전국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청소년집회 요청도 쇄도했다. 신학이나 목회훈련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청소년을 돕고 싶어 하는 전국의 청소년지도자들을 모아 훈련해야만 많은 청소년들을 붙잡아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들을 모아 3박4일씩 훈련을 시작했다. 도시마다 청소년을 상대로 집회를 열고 지도자들을 훈련했다. 이 과정에서 ’79년 조직적인 훈련과 연계를 위해 북미주청소년지도자협의회를 조직, 젊은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북미주, 남미, 아시아, 유럽까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대학생들과 대학을 졸업한 청년층의 집회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사역도 귀국할 때까지 계속됐다. 현재 미주의 청소년지도자들은 거의 다 그 당시에 헌신하고 훈련 받은 사람들이다.
쇄도하는 한인교회 집회 요청
’78년 워싱턴 지역 대전도대회 이후 전국교회의 성인집회 요청이 쏟아져 들어왔다.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 오전까지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금요일 오후에 비행기를 타고 가서 월요일 아침에 도착, 다시 일주일을 시작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이민자들의 각종 집회에도 가야했다. 초기에는 거의 주말마다 타 지역에 나가 금요일부터 사흘 동안 최소한 여덟 번씩 설교와 강연을 했다. 생명을 건 헌신이었다. “하나님, 이들을 나에게 맡겨주십시오.” 소진된 에너지를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 집회약속은 2~3년까지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3년 반을 계속하고 나자 건강이 완전히 바닥이 났다. 소화가 되지 않았고 에너지는 탈진되어 감당할 수 없었다. 학교 강의를 마치고 연구실에 돌아오면 연구실 바닥에 누워있다 다시 일어나 강의하러 교실로 가곤했다.
발티모아 벧엘교회 창립 그리고 한국의 세 기관 귀국 요청
’79년 발티모아에 있는 소수의 기독교인들이 교회개척을 요청해 왔다. 교수직에만 전념하기로 굳게 마음먹고 목회사역은 이미 접은 상태였기 때문에 거부했다. 그러나 끈질긴 요청으로 목회를 주말과 수요일 저녁에만 하고 교회가 안정되면 1년 후 담임목사를 구한다는 조건하에 수락했다. 1년이 지나 교회가 목표 이상으로 성장했다. 교회는 담임목사 찾기를 원치 않았다. 다시금 교수와 담임목사 사역을 또 겸하게 됐다. 그동안 약속돼있던 외부집회 요청은 완전히 중단할 수 없어 한 달에 한 번만 나갔다. 교회는 점차 큰 교회로 성장, 대지 5만평을 구입해서 그 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형교회 건축물을 창립 7년 만에 완성했다. 이민교회 역사의 큰 성취였다. 벧엘교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대교회 가운데 하나로 우뚝 섰다. 교수생활, 목회생활, 외부집회, 방송국 등 모든 것이 풍성했다. 새 교회건물이 완공되고 얼마 안 되었는데 한국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횃불선교센타, 할렐루야교회 이 세 기관이 연합해서 귀국을 종용했다. 교수, 목회, 선교사역 등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던 김 목사가 적격이었던 것이다. 한국으로 갈 생각은 추호도 없어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들은 미국으로 김 목사를 계속 방문했고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통해 귀국을 종용했다. 한국 측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피신의 목적으로 안식년을 얻어 영국 에딘바라대학교 방문교수로 가 있던 ’89년 10월 밤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들었다. 너무도 확실한 말씀이어서 원치는 않지만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목사를 놀라게 한 명예신학박사
안식년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90.6 대학 측은 떠나는 목사에게 그 해 졸업식 연설을 부탁했다. 그 대학 교수가 졸업식에서 설교를 맡은 것은 처음이었다. 20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겸손하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지막 일종의 고별 설교를 마치자 총장이 미국에서 26년간 교수로서, 목회자로서, 선교운동가로서 이룬 공로를 치하하며 명예박사학위 내용을 낭독하고 후드를 목에 걸어주었다. 의외의 일이었고 그 대학의 교수에게 명예박사를 준 것도 과거에 없었던 일이었다. 교회 측 역시 시내 호텔식당에서 이임 만찬회를 열어 교회와 목사의 영원한 결혼을 상징하는 벧엘교회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목사는 한국인은 모래알 같아서 협력이 안 된다는 악평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꼭 한번 경험하고 싶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벧엘교회 목회 11년 동안 한국인들의 모래알에 사랑의 시멘트를 섞어 성령의 물을 부으면 자랑스러운 미주의 대표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아신대 교수, 횃불선교센타 실행위원장, 할렐루야교회 담임
당시 학생들이었던 세 딸을 미국에 두고 부인과 둘이 26년 만에 외국과 같이 느껴지는 한국으로 돌아온 목사는 일주일 중 사흘은 아시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 이틀은 횃불선교센타 실행위원장, 남은 이틀과 수요일 밤과 저녁 시간들은 할렐루야교회 목사 이렇게 다람쥐의 쳇바퀴 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상 못한 어려운 일들이 대학 내에 잠재돼 있었으나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횃불선교센타에서는 스탶들과 함께 서울에만 국한되어 있던 목회자와 목회자 사모들을 재훈련하는 국내사역을 전국 대도시들로 확장하는 한편, 국내선교국, 국제선교국, 특수선교국으로 삼분화하여 조직을 확대 개편했다. 국제사역은 거의 없었는데 세계 100개의 미전도종족복음화라는 목표로 해외사역을 시작했다. 한국선교사를 해외로 보내고 외국 목회자들을 한국에 불러와 사역훈련을 시켜 돌려보냈다. 사역의 확대 결과, AD2000 and Beyond Movement, 횃불선교센타, 한국CCC 등이 중심이 되고 한국교계가 연합하여 ’95년 여름 182개 국가 4,300명의 국제 대표들이 참석하여 미전도종족복음화의 대사명을 일깨우는 20세기 기독교국제올림픽이라 불리운 GCOWE’95 세계선교대회를 횃불선교센타에서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한국에서 처음 있는 대형 국제선교대회였다. 특수선교국은 할렐루야축구팀 운영, 횃불출판사 창립과 기독교서적 출판, 횃불성경연구소, 어린이 아와나 사역, 횃불장학기금 운영 등 많은 사역들이 조직적으로 운영됐다. 국내, 해외, 특수사역 등 세 가지 영역이 시간이 감에 따라 안정을 이루며 ’93년 양재동에 횃불선교센타 신축건물마저 완성되면서 한국기독교계 최대 선교센타로 부각되었다. 영어로는 전 세계가 익숙한 미국의 US Center for World Missions 와 비슷하게 Torch Center for World Missions 로 명명했다.
할렐루야교회는 취임 1년여 만에 교인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앉을 자리조차 턱 없이 모자랐다.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다. 목사는 대치동을 무조건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많은 협의와 연구 끝에 마침 완성된 횃불선교센타가 갖고 있는 2,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전을 주일만 임대하고 1천명이 들어가는 희락성전은 수요일 밤만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가고 이전했다. 양재동 시대가 열리자 교인들이 또 몰려들기 시작했다. 양재동에서 반년이 지나자 분당 야탑산의 대지를 기적적으로 확보했고 1년의 준비 후 ’93년 4천 평의 대지에 2만평의 연건평을 가진 한국에서 가장 큰 단일 교회건물을 짓고 ’97년 4년만인 IMF 한 달 전에 입당했다. 이 건물은 ’05년에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민일보’ 평가팀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1호로 건축대상을 받았고, ’06년에는 경기도 문화건축대상을 받아 경기도 15개 대표적인 건축물 중에 최고의 영예를 얻어 경기도지사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할렐루야교회는 주목을 받는 세계교회가 되었다. 할렐루야교회는 지역사회와 한국교계와 세계교회가 각종 모임을 위해 사용하는 기독교종합센타가 되었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총장
목사는 ’97년 횃불선교센타와 미국 시카고 트리니티국제대학교의 합의로 영어로 신학대학원 수준의 신학교육을 하는 한국의 유일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를 설립에 참여, 창립 초대총장으로서 백년대계의 토대를 확고히 다진 결과, 세계적으로 비상하는 국제적 신학대학원으로 급부상, 미국인들을 포함한 많은 해외 유학생들이 복음적 신학이 확실하고 교회가 왕성한 한국에 와서 신학교육을 받아 자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과 세계의 국제적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목사는 교회사역에 전념하면서도 아직도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의 명예총장과 교수로서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교계와 세계교계를 위한 기타 공헌
목사는 귀국 후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자문위원, 청소년위원장, 북한교회재건운동 위원장, 남북교회협력위원장 등으로 북한의 문이 열릴 경우를 대비해 6․25전까지 북한에 있었던 3천개의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북한교회재건 계획을 전 교단의 협력 하에 4년(’93~’97)에 걸쳐 완성하는 큰 성과를 거뒀는가 하면, 북한돕기운동을 일으켰고, 기독교 평화통일정책 등을 완성하여 세 권의 책을 출판함으로써 북한복음화를 위한 북한교회재건운동과 북한돕기운동과 통일정책수립운동에 이바지했다. 또 ’91년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를 한국에 창설하는데 창립멤버로 협력하여 공동회장으로 현재까지 한국교회가 세계를 섬기는 사역에 한국 교계지도자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다. ’06년 여름에는 할렐루야교회에서 한국의 교단 선교부 대표, 선교단체 대표, 목회자 대표, 선교사대표, 선교학 교수들이 모여 한국교회의 지난 25년간의 세계선교를 평가하고 한국교회선교의 다음 25년을 위한 2020년까지 평신도 선교사 100만 명을 동원하기 위한 TM 2020 비전과 2030년까지 전문 선교사 10만 명을 전 세계에 내보낸다는 Target 2030 비전을 완성하는 선교전략회의(NCOWE 2006)의 준비위원장으로 섬겼다. 한편 ’95년 주기철목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현재까지 섬기며 주 목사님의 자서전 보급, 주 목사님의 아들 주광조 장로와 평양 산정현교회 출신 기독교인들과 주 목사의 영향을 입은 분들과 함께 주 목사님에 대한 한국교회의 대표적 역사학자들을 통한 연구발표 세미나를 매년 열어 주 목사님의 사상과 신앙과 신학과 삶을 조명한 책을 10권이나 발간, 훌륭한 목회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장신대, 총신대, 고신대에 주기철목사기념장학금을 수여하는 등 기타 많은 사역을 감당해 왔다. 목사는 한국에 돌아와 약력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시아신학연맹, 세계신학대학총학장회의, 세계복음주의협의회 국제이사, Transform World Movement 회장 등 아시아와 세계를 위한 다양한 국제 사역에 한국을 대표하여 회장, 의장, 주강사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재임 7년 동안에 여섯 개 도시에 무료신장투석병원의 설립에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03년 4월 바그다드에 이락복음주의신학교(IES) 설립에 참여하고 후원이사장으로 섬겼고 이란의 최초 신학세미나를 바그다드에서 열었다. 같은 해 8월 테헤란에서 열린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 세계평화대회의 명예회장과 주강사로 두 종교의 대화를 통한 세계평화를 추구하며 테헤란평화선언문을 채택, 유엔과 국제 언론에 보냈고, ’04년과 ’05년 여름에는 예루살렘평화대회 공동회장과 주강사로 활동했다. 팔레스타인지도자들과의 회의를 통해 중동의 평화 구축을 위해 노력을 기우려 왔다.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한독선연) 조직
할렐루야교회는 교단에 속하지 않은 한국의 첫 번째 초교파적 독립교회인데 ’97년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를 창립, ’01년부터 2대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현재 한독선연은 2,00개 교회, 선교단체, 신학대학 및 대학원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어 정치성을 배재하고 자유로운 사역을 추구하며 한국교회의 폭넓은 연합을 추구하는 참신한 독립교회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세 딸 모두 결혼했다. 장녀는 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 깊은 오지 가난한 모슬람들을 위해 의료선교사로 사역하고 있고, 둘째는 워싱턴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고, 막내는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태국의 선교사, 미국 시카고대와 컬럼비아대 대학선교 간사, 뉴욕 하비타트 정책홍보실장을 거쳐 뉴욕지역 성공회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손자와 손녀는 6명이다.
Dear pastor Kim,
First we like to send our congratulation for your 70th birthday. It’s good to know your daughters came over to be with you.
Happy New Year to you and your wife. Hopefully the coming time will reveil to you what to do in obedience response towards our Lord God in Jesus. May the Holy Spirit be your guidance towards His will.
Greetings from us.
Andre Visser.
Dear Andre, Happy New Year to you and your family. I set this blog up a year ago for an example how to do it and have not opened it until today. So I didn’t know you have written up something until my daughters visited me in Korea and began to talk about the blog set up before and came across with your comment. It was good to talk to you on the phone the other day. I realized that it is very difficult for you to live there as Christian. My prayer goes with you. I just celebrated my 70th birthday yesterday at the church. My daughters came to be with me. It was a great time for us. I wish you to be faithful to the Lord inspite of the hostile environment. SB David Kim